2010. 10. 16. 21:05


 휴대폰이 우리나라에 급속도로 보급된 건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즈음이었다.
그 후 좀 지나서 카메라폰이 나왔고, 휴대폰은 어느새 필수품이 되어 손에 휴대폰 안들고 다니는 아이를 보기 힘들어지게 되었다.


아마 이게 맞지 싶은데... 하도 오래 전이라 잘 모르겠다.


 나는 휴대폰을 남들보다 빨리 써본 경우에 속한다. 내가 중3 때, 누님이 휴대폰을 바꾸면서 쓰던 휴대폰을 내게 주었었다.
지금 십대들은 들어보기나 했을까 궁금한 플립형 휴대폰이었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 어깨 으쓱거리며 학교에 들고 가 자랑하곤 했지만,
사실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제대로 써볼 기회가 없었다. 내가 휴대폰이 있으면 뭐하나. 다른 아이들이 없는 걸.

 하지만 그때라고 해서 지금과 달리 친구들과 만나기 힘들었던 건 아니다. 지금 그렇게 하라고 하면 못하겠지만...
어쩌면 정말 어릴 때 친구들과는 텔레파시가 통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심심해서 집을 나서면, 꼭 만나게 되던 내 어릴적 친구.
그때를 생각하면 텔레파시란 건 거창한 게 아닐거란 생각이 든다.
그냥 '내 친구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 보면 떠오르던 동네 허름한 오락실, 녹슨 그네가 삐걱거리던 놀이터. 학교 운동장 구름사다리.
그 생각이 바로 어린시절 나와 친구를 만나게 해준 텔레파시가 아닐까.



 매년 무한도전이 연례행사로 했던 추격 버라이어티의 핵심 장비는 휴대폰이었다. 서로 떨어진 공간에서 휴대폰을 통한 이야기로 상대방의 장소를 추리해 추격하는... 만약 휴대폰이 없었다면 무한도전의 추격 버라이어티는 성공하기 힘들었을 거다.  

 하지만 오늘 텔레파시 특집은 그 추격 버라이어티를 살짝 비틀어 본 특집이었다. 오늘 게임의 기본 골조는 간단했다.

"전과같이 멤버들이 어디에 있을지 생각해 찾아내라. 단 휴대폰 없이!"

 휴대폰이 없어짐으로 인해 무한도전의 추격 버라이어티는 전혀 다른 색으로 변주되었다. 긴박함이 사라지고, 빅재미도 줄어들었지만(...) 긴박감이 주는 흥분이 아닌, 누군가를 만난다는 기대감과 설레임이 주는 흥분의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사실 이런 기분을 느껴본 건 참 오랜만이었다. 연락도 안되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것. 휴대폰이란 놈이 내 손에 쥐어진 이후로 느껴본 적 없는 기분.
친구가 안오면 버튼 몇개로 쉽게 연락해 위치를 알고, 올 시간을 알수 있는, 지금은 모르는 그 기분.

요즘 어린 아이들이 이런 기분을 모를 거라 생각하면 조금 슬퍼지기도 한다.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혹은 찾으면서 드는 생각들.

'이 녀석이 어디 있을까', '얘는 어디 가면 찾을 수 있을까', '이녀석, 오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어린 시절, 오랜 시간 친구를 기다릴 때 난 그 친구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했었다. 걱정, 화, 초조함. 
그리고 그만큼이나, 친구를 만났을 때의 기쁨. 저 녀석이 내 눈 앞에 있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기쁜 그 기분.



텔레파시 특집이 알게 모르게 뭉클했던 건 단순히 무한도전의 지난 6년간을 돌아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지난 추억이

내 어린시절의 그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리라.

단순히 지나간 흔적을 돌아보는 것으로 시청자들을 뭉클하게 만들기에는, 시청자들은 다양한 프로의 하이라이트를 너무나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정준하와 하하가 만났을 때. 수십 분 전부터 둘이 장충체육관으로 향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둘이 만나는 모습에서 기쁨과 왠지 모를 뭉클함이 느껴진 건,
어린시절 한참을 기다려 만났던 소중한 친구가 기억났기 때문이리라. 



정형돈과 길이 한 장소에서 서로를 보지 못하는 걸 보고서,
결국 촬영이 끝났을 걸 생각하면 결국은 만났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안타까운 건,
서로 조금씩 엇갈려 뻔히 근처에 있었던 친구를 결국 만나지 못하고, 처진 어깨로 집으로 돌아갔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리라. 


 

지금 내가 휴대폰 없이 살 수 있을까? 확실히 못 산다. 이미 휴대폰에 길들여진 삶이 10년이 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오늘 무한도전을 보면서. 한 번 쯤은 그렇게 어린시절처럼 휴대폰 없이 내 소중한 친구를 만나보고 싶어졌다.


ps. 화면빨 참 좋더라.

Posted by 시스템-쇼크